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 불가침조약 (문단 편집) === 집단 안보 체제의 붕괴 === 나치 독일은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를 양도받은 뒤에도 멈추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를 강점하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설립했다. 기세가 오른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유럽에는 다시 전운이 고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한끼 식사가 된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안보가 흔들리는 문제를 막을 필요가 커졌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간접적으로 싸운 전적이 있었고 나치와 국경을 맞대게 된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은 소련대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1938년과 달리, 이번엔 양측 모두 상당히 진지하게 접촉하며 의견을 주고 받았다. 최우선적으로 독일의 팽창 저지와 제압을 목표로 하는 데에는 양측의 의견이 동일했다. 소련의 외무 장관 몰로토프는 영국, 프랑스에게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 세 열강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삼국 간의 협상은 회담 시작 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영국은 문서를 전달받은지 6주가 지나서야 답신을 보내왔으며, 그마저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초조해진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불-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사절단은 한 달 가까이 지난 8월 10일이 되어서야 소련에 도착했는데, 협상단이 [[비행기]]가 아닌 [[여객선]] '시티 오브 엑서터(City of Exeter)'호를 타고 느긋하게 넘어와서 지체된 것이었다. 게다가 [[레닌그라드]]에 입항하고 나서도 바로 모스크바에 가지 않고 관광부터 하면서 소련 측에 '저것들 놀러왔나?'와 같은 나쁜 인상을 심어주고 말았다. 하루 동안 관광이 끝나고 8월 12일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에서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회담에 참가한 협상단도 문제였다.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계급)|원수]]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불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보로실로프 외에도 당시 소련 [[육군참모총장]]이던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장성 여럿이 협상에 참석하였다. 스탈린이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 [[파일:external/pocketbookuk.files.wordpress.com/reginalddrax2.jpg|width=100%]] || || 모스크바에 도착한 영불 협상단 || || [[파일:external/images.npg.org.uk/mw93656.jpg|width=100%]]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1609b6328f94defbdeaaae01f9859412.jpg|width=100%]] || || 영국 협상단장 [br] 레지널드 드락스 경(1880-1967) || 프랑스 협상단장 [br] 조제프 두망(1880-1948) || 반면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단장은 소련에 비해 그 지위가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사령관 육군 대장(Army General) [[https://fr.wikipedia.org/wiki/Aimé_Doumenc|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으로,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정 서명권을 위임받고 있었기는 하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두망 장군이 서명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은 한술 더 떴는데, 영국 협상단장 [[https://en.wikipedia.org/wiki/Reginald_Drax|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 본명은 레지널드 에일머 랜펄리 플렁켓언리얼드락스(Reginald Aylmer Ranfurly Plunkett-Ernle-Erle-Drax). [[조지 6세]] 직속 [[영국 해군|해군]] 장교였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계급)|대장]]]은 해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일개 [[함장]] 출신인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조차 없었다.''' 자국의 거물들을 협상단으로 때려박은 소련에서는 매우 당황하고 불쾌해했다.[* 주영 소련 대사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Ivan_Maisky|이반 마이스키]](Ivan Maisky)는 영국 외무장관인 [[https://en.wikipedia.org/wiki/Edward_Wood,_1st_Earl_of_Halifax|핼리팩스 경]](Lord Halifax)을 협상단장으로서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어쨌든 협상이 시작되고, 전쟁 발발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에 대해서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군사)|사단]], 중포 5천여 문, [[전차|탱크]]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1941년 독소전 개전 당시 소련은 1938년부터 시작해서 9000대 이상의 폭격기와 1만 3천의 전투기, 장갑차 2700여 대를 생산해서 주요 전선에 배치해 두었고, 탱크 2만 2000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2년의 기간과 생산 속도, 배치 과정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 볼 때, 1939년 협상 당시의 소련은 가지고 있는 모든 카드를 영-불 양국에 보여줬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000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히면서 보로실로프가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 라고 되묻게 만들었다. 당황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 단 '''4개 사단'''만이 투입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1차 대전 때 대륙에 파견된 영국군 사단만 해도 80여 개에 달했다. 따라서 16개, 4개, 2개 운운한 건 영국이 독일의 확장 야욕을 진심으로 억누르고자 하는지 의심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성장과 대공황으로 영국의 국제적 지위가 많이 하락하긴 했으나,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나라인데다, 당시 [[인도 제국]]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해군과 공조하는 해병이 매우 잘 정비되어 있기로 유명했는데,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한 나라가 완편 사단을 겨우 2개 동원할 수 있다는 건 듣는 입장에서 황당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실제로 전간기에 상당히 군비감축을 했기 때문에 능력이 1차 대전 때보다 매우 줄어든 상태였고, 1차 대전에도 본격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동안 프랑스가 혼자 막아내야 했던 것을 고려하면,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많을래야 많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인버고든 항명|수병들한테 지급할 월급도 부담스러워 삭감하려고 했었을 정도였다.]] 또한 영국은 전세계에 걸쳐 있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지상군을 식민지에 분산 배치해야 했기 때문에 본토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은 많지 않았다. '인도 제국을 비롯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앞 주석의 내용이 영국의 병력 분산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면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Molotov%E2%80%93Ribbentrop_Pact_negotiations|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협상 과정]]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돌아오자 소련은 멘탈이 나간 나머지 할 말을 잃었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부추기려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품었다. 사실 이런 의심은 의심이랄 것도 없이 영국 정계에서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어서 의심이라기보다 영국이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했고, 사실 당시 영국 정계의 상황을 보면 스탈린의 판단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당장 이 수치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첫 대륙 원정군 규모인 4개 사단에도 못 미치는 소규모 병력만 즉시 투입 가능한 데 반해 전쟁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보였으므로, 소련은 영국인들이 제대로 싸울 의지 자체가 없다고 보았다. 영국은 이미 1938년 후반부터 방위 산업 생산 규모를 대폭 확장하기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인들은 실제로 영국군이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섬나라]]이고 전통적으로 [[모병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평소에는 대규모 상설 육군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워털루 전투]]에 출동한 영국군도 약 3만 명에 불과했고 (프랑스군 약 7만), [[크림전쟁]] 때도 약 10만, 1차 대전 발발때도 24만에 불과했다. 전쟁 직전 프랑스군이 60만, 독일이 120만이었다. 다만 영국도 2년차부터는 육군을 확장하여 최종적으로는 전쟁 말기에 380만의 병력을 동원하게 되지만 이건 전쟁이 실제로 터지고 난 이후에 총동원령을 내려 동원한 거지 전쟁 터지기 전에 대기시킬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많았으니 식민지에서 병력을 차출하면 되는거 아닌가 하는 소리도 있지만 식민지의 병력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를 통치하고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차출할 수 있는게 아니고, 식민지인으로 구성된 병력은 [[문화]] 및 [[언어]]의 차이로 인한 장벽 때문에 대규모로 운용하기도 어려웠으며 식민지인들도 지배자에 불과한 식민종주국의 그들만의 전쟁에 그닥 협조적으로 나올 리가 없으니 처음부터 대규모로 동원하기도 어려웠다. 2차대전 당시 식민제국을 보유한 많은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인 부대를 운용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병력이었고 대다수의 주력은 본토인으로 구성된 병력이었다. 또한 [[1930년대]]의 대영제국은 이미 식민지들에 대한 통제력이 와해되고 있어서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각 식민지들이 거의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령]]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국이 건재하던 1차대전 당시와는 달리 비해 식민지를 곧바로 전쟁에 동원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육군 보다는 공군, 그리고 공군보다는 전쟁 재정에 대한 확충을 더 우선시 했다.[* 이는 대륙 전쟁에 말려들 때 영국의 관습적인 대응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도,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시작은 똑같았다. 대륙에서 전쟁이 악화되더라도 본진은 털릴 일이 잘 없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는 데 우선적으로 신경을 썼다. 뿐만 아니라 해군에 집중하는 섬나라의 특성상 영국 육군의 규모는 다른 대륙국에 비해서 규모가 작았던 만큼 대규모 병력을 확보할 시간도 필요하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과 1차 대전 모두 영국은 결국은 대규모의 육군을 투입해서 싸웠다.][* 사실 당시 영국도 결코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특히 1차 대전 직후 파운드화가 미국 달러에 밀려 기축통화에서 밀려났다. 그러므로 영국 정부가 가능하면 유럽의 육상전에 참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사실 당연한 결정이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면 [[참호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폴란드)서(프랑스)로 각각 100만의 대군[* 여기에 유사시 연합국을 도울 수 있는 소련군 500만이 플러스 요인이다.]을 면전에 둔 독일군은 적어도 한동안 지체될 것이지만, 영국 육군의 개입 없이도 독일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1차 대전 때도 영국 육군은 초반 2년을 매우 소극적으로 임했고,[* 대전 발발 2년 후까지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였다. 그 동안 독일 서부군의 주공은 모두 [[프랑스군]]이 막아냈고, 프랑스가 엄청난 손실을 봤다.] 이는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는 영국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당장 히틀러와 독일군의 총칼에 맞서게 되는 소련이 "돈 댈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좀만 참으라."라는 태도를 좋게 봤을 리는 만무하다. 요약하면 영국이 보인 행동은 지금까지 대륙 전쟁에 개입할 때의 전통을 따랐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이렇게 확실한 전쟁 준비보다는 금융 자본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영국 측의 태도가 당장 나치와 총칼을 맞댈 수도 있는 소련에게 "이 새끼들 같이 싸울 생각은 안 하고 돈벌이에만 급급해?" 라는 커다란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영국의 금융 자본은 1차 대전 때도 프랑스에 전쟁 자금으로 각국에 엄청난 [[차관]]을 빌려주었고,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탕감해주면서도, 정작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에는 그런 혜택 없이 받을 것을 전부 받아가서 커다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반영 감정이 고조된 바 있었다.[* 요컨대 벌금은 탕감해줄 수 있지만, 빚은 탕감해줄 수 없다는 논리. 국가 간 채무관계는 중요하지만, 제1차 대전에서 프랑스가 탱커 역할을 하면서 독일 서부군의 주공을 막아낸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 국민으로서는 분노할 만 하다. 당장에 영국은 전쟁 초기에는 꽤 미적지근하게 기여했다.] 영국이 육전에 대한 대비보다는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충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던 것은 대륙 국가들이 당분간은 어떻게든 독일을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프랑스 침공|오판]]이었다.[* 대륙 국가들이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는 동안 돈놀이를 해 보겠다는 의도 또한 부정할 수 없기는 하다. 이런 차관은 국가대 국가도 있지만 영국의 금융기업이 각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영국 정부도 그다지 손댈 수 없었다. 유대계 영국자본인 로스차일드는 1차대전때 영국을 포함해 연합국 각국에 거액의 전쟁자금을 대출해주고 이후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소련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로 전쟁이 시작되면, 군병력 동원이 오래 걸리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소련과 폴란드가 힘을 합쳐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쯤 독일군을 동부에 붙들어 주기를 기대했다.[* 훗날 폴란드가 예상과 달리 1달만에 초고속으로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라인강을 넘어 공세하지 않는 가짜 전쟁을 펼쳤는데 소련과의 협상 당시 보인 전략, '독일군이 잘 준비된 자신들의 방어선에 들이받아 아주 약화시켜놓으려는 것' 그대로 실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폴란드가 빠르게 무너진 건 소련에 의한 양면전선의 영향도 크다. 독일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준비가 미흡했고 소련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폴란드에게 시간을 더 끌렸으며, 금방 물자가 바닥날 정도였다. 자세한 것은 [[폴란드 침공]]을 참고.] 그리고 소련은 그런 장기 지연전의 결과로 소련군만 피를 흘리고 마는 게 아닌가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독일과 소련이 다같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영불이 기습 공격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조차 가능해 보였다. 매사에 의심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그런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러시아 제국]] 시절 때부터 [[그레이트 게임]]으로 인해 영국과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 1850년대 [[크림 전쟁]]부터 쭉 적대 관계. 1900년대 초에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때도 진영 이름이 동맹이 아닌 '''협상'''이었다. 다시 말해 [[오월동주]]. [[삼국 협상]] 가운데 동맹 관계는 오직 [[러불동맹|러시아-프랑스]] 뿐이었다.]였기 때문에 소련의 그런 의심은 충분히 타당했다. 적어도 [[러시아 내전]] 때 전 세계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경험을 잊지 않은 소련과 스탈린에게는 타당해 보였다. 여기에 10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는 프랑스는 [[마지노선]]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쪽에서 피터지게 싸우든 말든 프랑스는 우주방어나 하겠다는 얘기다. 이런 대답을 들은 소련의 기분이야 뭐... 그리고 근본적으로 영프는 처음부터 소련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다. 1920-30년대 서방권 외교 기류였던 윌슨의 이상주의는 역사의 선악을 구분하는 흑백논리적인 경향이 있었고 거기다 당시 영프는 파시즘보다 공산주의를 더욱 경계하였기에 당연히 서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이 진행될 리 만무했다.[* 소련과의 관계를 넘어서 영프는 공산주의를 순수 악으로 보았고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에도 [[독일 공산당|독일의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나치당이 득세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